안녕하세요. GDI의 H입니다. 지난 한주간 서울은 늦더위로 인해 무척 뜨거웠습니다. 저 멀리 스웨덴의 고덴버그 역시 뜨거웠습니다. 물론, 서울과 같이 날씨 때문에 뜨거운 것은 아니고, 차세대 이동 통신 표준인 5G 기술을 논의하기 위한 3GPP 회의 열기로 인하여 매우 뜨거웠습니다. 회의에 참가한 GDI의 K와 N의 목격담에 따르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세계 이동 통신 표준이 LTE로 통일 되다시피 한만큼, 5G를 위한 LTE 표준을 논의하는 3GPP 회의에 많은 사람들의 이익이 걸려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5G 표준화를 위한 열기가 고조되기 시작한 시점에서 무선 통신의 기초라 할 수 있는 AM/FM 관련 발명에 얽힌 이야기를 GDI 블로그를 통해 나누어 볼까 합니다. (참고로, 제가 대학교 전공 시간에 통신의 기초라는 수업을 통해 처음 배운 무선 통신도 바로 AM/FM입니다.)
에드윈 하워드 암스트롱(Edwin Howard Armstrong)[1]
AM/FM의 아버지 에드윈 하워드 암스트롱
에드윈 하워드 암스트롱(Edwin Howard Armstrong, 1890년 12월 18일)은 미국의 전기공학자입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무선 통신을 연구하여 AM/FM 통신의 상용화를 위한 중요한 발명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암스트롱은 무선 통신과 관련하여 42개의 특허 획득하였고, 무선학회(현재의 IEEE)가 수여한 최초의 영예상(Medal of Honor), 프랑스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 1941년 프랭클린 메달, 1942년 에디슨 메달을 포함하여 수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암스트롱은 대학을 졸업한 뒤, 무선 통신 연구에 매진하였으며 연구 초기에 AM 방식의 통신을 비약적으로 발전 시킬 수 있는 여러 발명에 성공합니다.
이어폰 없이 들을 수 있는 AM 라디오의 시작
초기 AM 방식의 라디오는 출력이 약해 이어폰을 통해서만 방송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낮은 출력은 AM 라디오 방송의 대중화에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암스트롱은 포지티브 피드백 회로를 설계하여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포지티브 피드백 회로는 출력 신호의 일부분을 다시 입력 부분으로 되돌려 증폭하는 회로입니다. 암스트롱이 설계한 포지티브 피드백 회로를 적용할 경우, 기존 AM 수신기에 비해 대략 백배 더 큰 출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암스트롱이 발명한 포지티브 피드백 회로를 통해 사람들은 이어폰 없이 스피커를 통해 AM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암스트롱은 1920년 포지티브 피드백 회로에 대한 특허와 상업적 권리를 Westinghouse에 $335,000 매각합니다. 이때의 매각 계약은 포지티브 피드백 회로에 관한 특허 분쟁에서 승리할 경우, $200,000를 추가로 지급한다는 옵션까지 포함합니다. 암스트롱은 포지티브 피드백 특허와 관련하여 최초 발명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리 디 포리스트(Lee de Forest)와 법정 분쟁을 겪습니다. 당시 미국 특허법은 최초의 출원인이 아닌 최초의 발명자에게 특허의 권리를 부여하도록 되어 있는 선발명주의를 택하고 있었습니다. 리 디 포리스트는 암스트롱의 포지티브 피드백 회로 발명 전에 AT&T의 지원을 받아 연구한 회로가 암스트롱의 포지티브 피드백 회로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결국 법원은 리 디 포리스트의 손을 들어 줍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암스트롱이 포지티브 피드백 회로를 발명했음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암스트롱이 무선학회(현재의 IEEE)가 포지티브 피드백 회로 발명 공로를 인정하여 수여한 영예상을 법원의 판결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반납하자, 무선학회(현재의 IEEE)가 이를 다시 암스트롱에게 수여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방송국을 선택할 수 있는 AM 라디오를 설계
초기 AM 방식의 라디오는 수신된 전파를 그대로 증폭하여 발진 현상으로 인한 잡음이 심하고, 복잡한 증폭 회로가 필요했습니다. 암스트롱은 슈퍼헤테로다인(sperheterodyne) 회로를 설계하여 AM 수신 성능을 높였습니다. 슈퍼헤테로다인 회로는 수신기 내부에서 일정한 주파수의 신호를 생성하고, 생성한 신호와 수신한 신호를 믹스(mix)하여 중간 주파수(Intermediate Frequency, IF)를 만들어냅니다. 슈퍼헤테로다인 회로는 이렇게 만들어진 중간 주파수를 증폭하여 높은 이득과 선택도를 얻게 됩니다. 즉, 슈퍼헤테로다인 회로를 이용할 경우, 인접한 주파수 대역에서 방송되는 여러 방송 중에 원하는 방송을 선택하여 수신할 수 있습니다.
암스트롱은 슈퍼헤테로다인 회로에 대한 특허를 Westinghouse에 매각합니다. 당시 AM 라디오는 오늘날의 5G 기술처럼 세계 유수의 전자 회사와 통신 회사들이 기술 경쟁을 벌이던 분야였습니다. 특허 분쟁도 만연했던 터라 RCA, Westinghouse와 AT&T는 서로의 특허를 공유하기로 하는 크로스 라이센싱 계약이 체결된 상태였습니다. 크로스 라이센싱 계약에는 슈퍼헤테로다인 회로에 대한 특허도 포함되어 있었고, 암스트롱은 특허를 매각한 Westinghouse가 아닌 RCA의 엔지니어들과 같이 추가 연구를 진행하여 초기의 슈퍼헤테로다인 회로를 개량 발전 시킵니다. 개량된 슈퍼헤테로다인 회로는 라디오 수신기의 크기를 줄이고, 생산 단가를 낮추어 RCA의 이익을 비약적으로 성장 시킵니다.
암스트롱의 슈퍼헤테로다인 회로를 처음으로 적용한 RCA사의 상업용 라디오, 총 5 개의 주파수까지 선국할 수 있었다[3]
발명과 특허를 통해 “부와 명예”를 얻다
암스트롱의 금전적 성공은 포지티브 피드백 회로를 개량한 발명을 통해 절정을 이룹니다. 암스트롱은 1921년 자신의 발명인 포지티브 피드백 회로를 개량화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에 대한 특허를 RCA에 매각합니다. 특허 매각의 대가는 $200,000와 RCA 주식 60,000주 였으며, 암스트롱은 이후 기술 컨설팅 대가로 20,000 주의 주식을 더 받아 총 80,000주의 RCA 주식을 갖게 됩니다.
기존의 고정 관념을 깨고 만들어 낸 FM 혁명
AM 방식은 기본적으로 신호의 진폭을 변화하여 정보를 표현하는 통신 방식입니다. 이러한 AM 통신 방식은 기본적으로 잡음에 취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잡음을 없애기 위해 연구를 계속 했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존의 AM 통신 방식에 추가적인 장치나 기법을 사용하려고만 했습니다.
암스트롱은 AM 대신 FM을 사용한 다면 잡음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이에 대한 연구를 시작합니다. FM은 AM과 달리 주파수를 변화하여 정보를 표현하는 통신 방식으로, 1920년대까지만 해도 FM은 AM보다 더 큰 잡음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기존 기술 상식이었습니다. 암스트롱은 일정한 크기 이상의 주파수 대역을 사용하는 경우, FM 통신 방식이 기존 AM 방식보다 우수한 성능을 가지며 잡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발견합니다. 암스트롱은 이를 광대역(Wideband) FM이라 칭하고 광대역 FM을 위한 통신 시스템에 대한 기술을 연구하여 광대역 FM과 관련된 5개의 특허를 획득하고, 이에 대한 논문을 발표합니다. 실제로 암스트롱이 발명한 FM 무선 통신 방법에 따를 경우, 기존 AM 무선 통신보다 3배 이상 좋은 품질로 신호를 전송할 수 있었습니다.
AM과 FM의 모듈레이션 방식을 보여주는 그림[4]
비극의 시작
암스트롱이 FM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RCA의 사장이었던 오랜 친구 데이비드 사노프의 제안 때문이었습니다. 데이비드 샤노프(David Sarnoff)는 텔레비전 방송을 개척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암스트롱과는 20대 초반부터 친분을 쌓아왔습니다. 암스트롱의 아내 에스더 메리언 암스트롱(Esther Marion Armstrong)이 샤노프의 비서였을 정도로 샤노프와 암스트롱은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사노프는 암스트롱에게 AM의 음질을 개선하기 위한 연구를 제안했고, 암스트롱은 그 제안을 시작으로 FM을 연구하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샤노프는 RCA 비용으로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85층을 연구소로 내주고 암스트롱의 연구에 대한 모든 비용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샤노프가 암스트롱에게 기대한 것은 기존 AM 통신 방식을 발전시키는 일종의 필터 정도였고, FM과 같이 기존의 틀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기술 혁명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RCA는 라디오 보다는 텔레비전 방송에 더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RCA는 자사의 AM 관련 특허를 통해 다른 회사의 라디오 수신기 판매에 7.5%의 로열티를 부과하고 있어 기존 AM 방송 체제 유지를 원했습니다. 암스트롱은 RCA 간부들과 엔지니어들에게 FM의 장점을 몇 번이고 설명하며 특허 양도 계약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RCA는 번번히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계약을 미루었습니다.
세계 최초 비디오테이프 레코더를 보여주는 데이비드 샤노프[5]
거대 기업의 횡포
광대역 FM에 관련된 특허 구입을 RCA가 거절하자 암스트롱은 직접 FM 방송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암스트롱은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를 설득해 42∼29MHz의 주파수 대역을 FM 라디오 방송용으로 할당 받고, 1937년에 30만 달러의 거금을 들여 직접 FM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합니다. 이때 GE 등 여러 기업체가 암스트롱 FM시스템 제작 면허에 비용을 지불하는 등 FM 보급을 위해 암스트롱을 지원했습니다. 이에 따라 지역 중소 방송사들을 중심으로 FM 방송이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FM 단말기의 수요도 급증했습니다.
암스트롱의 FM 라디오 방송국 설립으로부터 3년 후인 1940년에야 RCA는 암스트롱에게 $1,000,000에 FM 관련 특허를 매각할 것을 제안합니다. 암스트롱은 2%의 로열티를 지급하고 있던 다른 제조사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RCA에 추가적인 로열티를 요구하였습니다. 암스트롱과 RCA의 협상이 진행되는 도중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전시상황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FM 기술은 로열티 없이 활용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RCA는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에 기존 FM 라디오 방송 신호가 텔레비전 방송 신호와 간섭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FM 라디오 방송 대역을 88∼108MHz로 이전할 것을 주장하고,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이를 받아 들여 FM 주파수 대역을 재할당합니다. 명목상 신호 간섭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는 기존에 암스트롱과 라이센시들이 판매한 라디오 수신기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암스트롱의 FM 기술은 FCC를 통해서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FM 기술을 미국 아날로그 방송 표준인 NTSC(National Television System Committee)방식 TV시스템의 표준 기술로 채택합니다. 이때, RCA는 FCC결정에 따른 FM 표준 기술 사용에 따른 로열티 지불을 거절했고, 심지어 다른 TV제조업체들에게도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을 것을 선동했습니다.
RCA의 로고, RCA는 1986년에 GE에 인수된 뒤 일부 사업 부분이 1988년 구 톰슨(현재 테크니컬러)에 매각되었다[6]
비극적인 결말
RCA는 이에 그치지 않고, FM 기술을 RCA가 먼저 개발 했음을 주장하며 텔레비전 방송에 FM 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 암스트롱은 RCA와 NBC를 특허 침해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RCA는 이에 이미 치밀하게 준비가 된 상태였습니다. RCA는 당시 유명 변호사에게 소송 대리를 의뢰하고, 의도적으로 소송을 지연시키는 전략을 실행합니다. 소송이 지연됨에 따라 소송 비용도 천문학적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암스트롱은 파산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암스트롱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깊이 좌절하여, 1954년 1월 31일 뉴욕에 있는 자신의 13층 아파트에서 뛰어 내려 생을 마감합니다.
암스트롱의 죽음을 다룬 해럴드 트리뷴의 기사[7]
뒤 늦은 합의와 승소
암스트롱의 아내 매리언은 남편의 뒤를 이어 소송을 계속 진행했고, RCA와는 약 1,000,000$의 보상금에 합의 합니다. 이후, 매리언은 CBS, 실베니아, 모토로라 등의 기업과 소송을 지속해 1967년까지 계속된 법정 공방에서 대부분 승소하여 약 $10,000,000의 보상금을 받게 됩니다. 이후, FM 라디오 방송과 수신기는 전세계에 퍼져나갔으며, NASA는 달에 착륙한 우주선과의 교신을 위해 FM 기술을 사용하였습니다.
암스트롱과 아내 매리언 1923, 암스트롱이 아내 매리언을 위해 제작한 슈퍼헤테로다인 회로가 적용된 포터블 라디오 수신기를 동작시키고 있다[8]
표준 기술과 특허의 기본
암스트롱과 FM 발명에 대한 비화 소개를, 표준 기술과 특허에 대한 “기본”에 대한 이야기로 마칠까 합니다. 기술 표준에서 기본은 가장 뛰어난 기술을 채택하는 것입니다. 표준화 과정에서 특정 기업이나 기관에게 이익을 가져올 기술이 아니라 산업 전반에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기술이 표준 기술로 채택 되어야 합니다. 또한, 특허의 기본은 뛰어난 기술을 공개한 기업 또는 기관은 공개의 대가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그 발명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야 합니다. 암스트롱이라는 세기의 발명가는 이러한 기본이 지켜지지 않아 안타깝게 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여러 표준화 회의에서 기술 자체보다는 힘의 논리에 의해 표준이 정해지는 것을 목격 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기술 발전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공헌은 쉽게 잊혀지고 있습니다. GDI는 표준 기술 연구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그 연구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Fair Value가 되돌아가는 세상을 꿈꿉니다. 이를 위해 GDI는 기본을 지키는 회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으며, 연구자들의 순수한 열정과 노력에 대한 보상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제 막 시작된 5G 표준화에서도 이러한 기본이 지켜지길 소망합니다.
이 글은 다음의 문헌들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1. 세계 방송의 거인들 FM의 발명자 에드윈 암스트롱
2. 영문 WiKi Edwin Howard Amstrong https://en.wikipedia.org/wiki/Edwin_Howard_Armstrong
3. THE TRAGIC BIRTH OF FM RADIO WRITTEN BY GREG BJERG
4. [이재구코너]전자문명의 불씨 진공관(12)FM 발명
출처
[2] Wireless Receiving System US 1,113,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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